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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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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0 *박제가, 욕망을 제거한 조선을 비웃다 / 임용한 지음 / 역사의아침
Date : 2018-01-23
Name : 생활의지혜
Hits :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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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박제가의 일생은 두 가지 부조리와의 싸움이었다.

하나의 일세의 천재에 대한 부당한 억압이다.
탁월한 통찰력과 판단력, 방대한 학식과 팔방미인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서얼이라는 신분,

고분고분하지 않는 성격,

동시대 지성의 수준과 똑같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는 평생 주류사회로 부터
따돌림과 무시를 당했다.

또 하나의 부조리는 조선의 꽉맥힌 국수주우와 왜곡된 애국심이다.
17-8세기 조선이 직면했 역사적 과제는 변화와 발전이었다.

조선뿐 아니라 한.일,중 모두가 직면해야 했던 현실이지만,

이 시기는 세계의 주도권이 서구로 넘어가고
자본주의와 산업화로 인해 기술과 문명의 발전 속도가 획기적으로 변하엿던 시기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무시했다.
오히려 조선의 정치가와 지식인은 더 국수적, 형식적,감전적으로 대처했으며,

그것이 불길한 징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6.박제가 사상의 핵심은 외국을 배워야 한다가 아니라
외국문화에서 배울것을 찾고,

나를 변화시키는 통찰과 분석의 태도와 방법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를 위해 박제가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문화,

우리 것에 대한 습관적 태도, 자랑과 자부심에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신랄하게 느껴지는

그 비판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21세기의 한국사회가 여전히
그 감성적인 국수주의와 자기기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24. 의식주는 인간의 기본권이면서 욕망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돈을 벌고 지위가 높아지면 대개는 그 욕망은 의식주로 분출된다.

30. 중국. 일본에도 서얼차별은 잇엇지만 차별법은 없었다.
이른바 서얼차별법은 조선에만 존재했던 독특한 법이었다.

33. 인간사회는 항상 두 얼굴이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차별에 항의하는 듯 서로 돕고 정을 나누며 사람들이,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자신이 받은 차별대우를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더 약한 자를 찾아내서 더욱 심하게 차별한다.

서얼차별법이 꼭 그런 경우 이다.

한번 물꼬거 터이자 사회 곳곳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차별방식과 조롱방법을 고안해내고 실행했다.

34. 군계일학이란 말이 있다.

사전적인 의미는
"닭떼중에 있는 한 마리의 학처럼 뛰어난 사람" 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보면 군계일학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실제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학이 등장하면 닭들이 떼로 덤벼들어 학을 쪼아 죽인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것이 세상의 진리다.

파블로 피카소, 빌 게이트처럼 간혹 특별히 운이 좋은 천재가 있다.

그들은 닭틈에서 날아올라 학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35. 그는 조선이 개국한 지 384년이 되던 해,
압록강 동편으로 1천여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고 밀양이 본관이다.

< 대학>에 나오는 "수신제거치국평천하" 에서 따서 제가라 이름짓고,
< 이소>에 들어 있는 <초사>에 의탁해서 초정이라 했다.

그의 사람됨은 이러하다.
물소 이마에 칼 같은 눈썹, 녹색 눈동자에 흰귀를 가졌다. - <정유각집> <소전>

36. 박제가는 진정한 천재였다.
그는 사춘기 무렵에 이미 조선의 지성계, 집단지성의 한계를 간파했고,
그 틈을 예리하게파고 들었다.

교과서에 따르면 17-18세기를 실학의 시대라 하는데
박제가의 앞 세대로는 지봉 이수광,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이 등장했고,

박제가와 동시대에 다산 정약용이 살았다.
그러나 우리가 실학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예지에는 과장된 평가가 많다.

몇몇 인물들은 모두가 다 아는 사회의 문제점들을 좀더 크게 이야기해서 눈에 띄었다.
어떤 이들은 부분적으로만 선각자였고,

오히려 남들보다 더한 보수주의자 또는 복고주의자도 있다.

43.시를 준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소개서 같은 것인데,

현대인들은 직업이나 학력등으로 자신을 표현하지만,
옛날에는 시나 작품으로 자기 소개를 대신했다.

87. 홍대용과의 만남이 백탑파의 일생을 바꾸는 커다란 계기가 된다.
1765년 홍대용의 숙부인 홍억이 청나라로 가는 사신의 서장관이 되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청나라 사람을 만나면
요즈음 "타도 제국주의" 식으로 무조건 반감을 가지고 대했다.

병자호란을 잊을수야 없겠지만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는 것과 100년후의 사람에게 치기를 가지고 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청나라 관리를 만나면은 곁으로는 절을 해도 속으로는
꼭 욕을 하고 뒤에서라도 마음속으로 침을 밷어야 조선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94. 진정한 선지들은 시의 기교보다 시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학문과 인격을 중시한다.

옛날에 시나 문장을 칭찬했다고 하면
시의 기교와 문학적 재능만을 칭찬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문장에 쓰인 한자, 은유, 인용한 고사를 보면
그의 독서 수준과 학문의 깊이를 알수 있다.

박제가의 시는 아려운 비유를 쓰기로 유명한데,
그 자체가 자신의 공부 수준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자 증명이었다.

118. 자존감이란 인간을 지탱하는 기본적 힘이다.

131. 농본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상공업을 억제한다는
정책의 목적은 지배층의 평안과 안정이다.

백성은 가난하고,다른 욕망이 없서야 말을 잘 듣고 통치하기도 편하다.
삶에 변화가 없고,

매일 똑 같은 일만하는 사람들이 정해진 운명에 순종적으로 변하고 말도 잘 듣는다.

반대로 노력하면 부자가 될 기회가 잇거나 아차 하면 더 가난해질 위험이 있으면
사람들은 역동적,적극적으로 변하든가 불만 세력이 된다.

상공업이 발달하면 부의 회전이 빨라져 부자가 몰락하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 쉽다.

사람이 부를 획득하면 그 다음에 노리는 것이 권력이다.
부자가 늘면 관료조직에 대한 도전과 경쟁도 자연히 거세진다.

상승과 몰락이 일상화 되면 귀족은 영원히 귀족이 되고
평민은 영원히 평민이라는 관념도 사라진다.

당연히 양반층에 대한 존경심도 희석된다.

134. 우리나라 시골의 농부들은 한 해에 무명옷 한 벌도 얻어 입지 못한다.

남자나 여자나 태어난 이래 침구가 무엇인지 구경 조차 못하고,
이불대신 멍석을 깔고 그곳에서 아들과 손자를 기른다.

아이들은 열살 전 후에가 될때까지
겨울도 없고 여름도 없이 벌거숭이로 다니다. <북학의 -농잠총론>

136. 박제가를 이상한 18세기 인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외국에 대한 열린 마음이었다.

조선의 지성사에서는
백사장에 떨어진 구술조각만큼이나 희귀한 생각이었다.

조선의 농본정책은 국내적으로는 상공업 억제,
대외적으로는 쇄국과 국수주의를 낳았다.

우리 교과서에서는 이 사실을 창피하게 여겨
중국, 만주, 일본과 이런저런 무역을 했다고 강조한다.

그건 사실이지만 상공업을 억재한다고 해서 완전히 없앨수는 없다.
문제는 무역의 양과 질, 그리고 방법이다.

조선은 상공업이든 무역이든 국가가 철저하게 통제하고 관리해서
성장과 발달을 억제한다.

민간상인,민간무역상이 있기는 하지만,
통제와 억압으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교역과 왕래가 억제되면서 새로운 관습,
낯선 문화와 외국에 대한 맹목적인 천시와 거부감이 사회전체에 팽배하게 되었다.

15세기 이전이였다면 쇄국의 휴유증이 좀 적었을 지도 모른다.
주변 세계와 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지리상의 발견과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획기적인 발전과 교역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조선은 그 이전에도 볼 수 없었던
강고한 국수주의에 몰입한다.

그 결과 서구는 물론이고 중국, 일본과의 격차도 점점 더 벌어졌다.

18세기가 되면 산업혁명마져 터져,
전세계가 발전과 변화라는 지진에 요동치기 시작한다.

서구 문물과 제국주의에 따라 청과 일본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선은 청과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세계 변화의 징조에 대해서도 눈을 감았다.

---

극소수를 제외하고 조선의 지식인은 이런 정보에 눈도 까닥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허위 정보에 위안을 얻었다.

'서양 사람들은 개처럼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눈다."

"털투성이 서양 사람은 짐승에 가까운 야만족이고 우린 문화인이다."

" 지금 그들은 무력이 조금 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야수가 인간보다 힘이 센건 정상이다.
궁극적으로 조선은 영원히 번영하고 그들은 망할 것이다.
인간과 반인반수의 경쟁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조선 사람들은 위안을 받았던 것이다.

138. 조선이 유일하게 존중했던 외국은 중국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격고 청나라가 중국을 점령하면서 이것마져 사라졌다.

병자호란은 조선 사람의 정신세계와 자금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삼전도의 항복도 치욕이었지만,
단군이래 우리보다 못한 열등족으로 취급하던 여진족이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그들을 황제로 섬기게 되었다.
분노한 조선 사람들은 청이 곧 망할 것이라고 무조건 믿었다.

여기에는 약간의 근거가 있다.
역사를 보면 거란,몽골, 중국을 점령한 동이족의 나라는 100년이 한계였다.

그러나 만주족도 그 사실을 알고,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런 노력도 무조건 무시하고 100년이 되기를 기다렸다.

안타깝게도 100년이 지나도 청나라는 망하기는 커녕 점점 더 강해졌다.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고,
납득할 수도 없던 조선은 망해 버리린 중화 문화가 조선에만 남아 있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중국 사람은 청나라의 의복과 체두변발을 하고 산다.
조선은 상투와 옛 복장을 보존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징표가 주자학이였다.
중국의 유학 정수를 조선이 보존하고 있다.

사실 이건 억지였다.
명나라의 복장과 조선과는 달랐고,
명나라의 유학은 양명학이지 주자성리학은 아니였다.

중국 사람은 중국사람대로 서양 문명에 대한 자존심이 강했는데,
서양 문명은 모두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우기며 마음을 달랬다.

중국은 서양문물의 발전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수용이라도 했지만, 조선은 단호했다.

155. 지성과 통찰의 첫 단추는 분석적 사고에서 시작해야 한다.

"좋다." "나쁘다" "잘한다" "못한다" "최고다" 라는 말은 일상생활에서는 아무 문제없지만,
판단을 요구하는 지적 사고에서는 사용해서는 않되는 말이다.

그 앞에 항상 "무엇" 에 라는 용도가 붙어야 한다.
누군가와 복사지와 화장지중 어느 것이 좋은 종이냐고 묻는다고 치자,

매끈한 종이는 복사지로써는 제격이지만,
화장지로는 끔직하다

160. "문화의 차이" 라는 주장의 뒤에 숨어 잇는 실체의 상당수는 그냥 "습관의 저항"에 불과하다.
누구라도 익숙한 습관을 바꾸기는 귀찮고 싫어 한다.

그때마다 자신의 현실안주적이고 게으른 습관이 원인이라고 차마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싫은 사람들이"문화의차이"라는 변명을 들이댄다.

162. 의식주를 인간의 기본 요구라 한다.

그 말은 의식주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수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살아보면 삶의 욕구가 의식주의 범위를 거의 넘지 않는다.

서민이나 거부나 자기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기 위해 투자하는 부분을 보면
거의 의식주 범위에 들어 있다.

조선 사회 또한 너무 가난하다보니 소비가 거의 의식주에 매몰된다.

171. 이덕무가 추구하는 것이 삶의 지혜에 대한 총체적 관심이라면
박제가의 목표는 그가 이미 질릴대로 질려버린 조선 사회의 답답함.

그리고 조선의 시계를 빠르게 돌릴 수 있는
효능과 기능에 대한 지식이었다.

190. 현재 우리 사회도 사치는 부가 윗목에서 노는 것이고,
복지를 위한 세금이나 기부만이 부를 아래쪽으로 순환시키는 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통과 소비도 부의 분배에 세금이나 기부 못지 않게 큰 기여를 한다.

같은 금액이라도 개인금고에서 정부나 자치단체의 금고로 갔다가 빈민에게 잔달되는 돈보다
시장에서 사치품이든무엇이든 유통구조속에서 돌아다니는 돈이 훨씬 더 많은 기여를 한다.

인간의 두가지 본능적 장벽이 진리를 막고 있었서이다.

첫번째 본능은 감정이다.

두번째 본능은 인간의 얄팍한 자기 만족이다.

203. 격양가는 농부가 밭일을 하다가 땅을 쳐서 장단을 맟추며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이다.

요나라의 전설적인 명군인 요임금이 어느날 변복을 하고 민정시찰을 나갔다.
한 노인 길가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한손으로는 포만감 가득한 배를 두드리고,
한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며 장단에 맟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지면 쉰다.
우물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임금의 덕이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 노래의 교훈은 백성들이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살 수 있게 해주는 정치,
정치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편안하게 살게 해주는 정치가 가장 휼륭한 정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훈에는 함정이 있다.
현실적으로 이런 사회가 가능하려면 발전도 욕구도, 추구하는 것도 없어야 한다.

모든 것이 풍족해서 만족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다.

식량은 겨우 먹고 살 정도로 생산되지만,
다른 먹거리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먹고 싶은 욕구도 없기에 배가 부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정치를 "우민정치" 라 한다.

농민들은 밭이나 갈며 극소수의 통치자와 지배신분에게는 철저히 복종해야 한다.

돈을 벌어 권력을 쥐어 보거나 신분을 상승시키겠다는 생각,

심지어 지위가 높은 사람이 사용하는 멋있는 모자나 신발, 귀걸이,바지 장식을''
나도 한번 만져 보았으면하는 생각조차도 하면 안된다.

더욱 무서운 함정은 이런 사회가 유지되려면
세상에는 우리 집단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우리 옆에 조금만 생각이 깨인 집단이나 욕망을 추구하는 집단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보다 금세 뒤쳐질 것이고 멸망하거나 노예가 될것이다.

220. 정조는 측근들에게는 더 특별히 신경을 썼다.

정조를 호학의군주,조선의 르네상스 군주로 만든 대표적인 업적이
규장각을 이용한 대규모 편찬사업이다.

정약용은 이 편찬사업의 상당수는 하지 않아도 되는 사업이였지만

오늘날의 근로소득사업이나 가난한 학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벌이는 학술용역사업처럼
총애하는 문신과 검서관들에게 무언가를 베풀기 위해 벌인 사업이였다고 회고한다.

278. 박제가가 영평현령으로 재직하고 있던 1800년6월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독살설이 나돌 정도로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권력승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순조는 왕위에 오르기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결국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기씨가 섭정을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1759년에 영조와 결혼했다.
영조는 첫 왕비 정성황후가 사망하자 재혼을 했다.

이 결혼은 아주 유명한데 결혼할 당시 영조가 66세,
정순왕후가 15세 였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는 졸지에 열살이나
어린 소녀를 시어머니로 맞게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고 정순왕후의 친가인 경주 김씨 세력과
혜경궁 홍씨 일가인 홍봉한 세력이 정치적으로 대립하자

그 배경이 어린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 때문이며
정순왕후가 사도세자 살해를 사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진실은 알수 없지만,
나이든 영조는 그녀에게 자식을 남겨주지 못했다.

영조는 그녀와 결혼한 후에도 무려 17년간이나 더 살아 83세에 사망하지만.

그때 정순왕후는 32세였다

혜경궁 홍씨와 알력이 심했던 그녀에게 정조의 치세는 고통의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본가도 세력을 크게 확장하지 못했다.

정조가 사망하자 벽파가 바로 전순왕후를 추대해서 수렴청정을 맡긴 것은
그녀의 한과 본능적인 정치적 야심을 간과한 덕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정순왕후도 벽파에게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사실 그녀의 수렴청정은 3년만에 끝났고,
1805년에 사망하자말자 그녀의 일가들도 숙청을 당한다.

그래도 그녀는 짧앗던 수렴청정 기간동안 과격한 숙청의 칼을 휘둘렸다.

첫 희생자는 정조의 외척이자 최초의 세도정치가라고 불리는 홍국영 세력이엇다.
정순왕후가 집권하고 두 개의 외척이존재 할 수 없는 이상 당연한 수순이였지만,

진짜 표적은 정조가 양생한 불온세력, 조선의 정통사회,
사대부들이 목숨처럼 사수하고자 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부정하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이단아들이었다.

1801년 1월 홍국영이 숙정되자 말자 바로 신유사옥이 발생햇다.
천주교 문제는 이미 정조대에 논란이 되여 있었지만 실제적인 박해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면서 박해파가 힘을 얻었다.
이것이 정치적 목적과 연결되면서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로 이어졌다.

302. 박제가도 정약용처럼 이 기회에 집필을 하고 싶어 했다.

그가 쓰려고 했던 책은 유교의 핵심적 경전인
13경 (역경,시경,주례,예기,의례,춘추좌씨전.춘추곡양정,논어,요경,이아,맹자) 에
새로운 해석과 주석을 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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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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