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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72 * 난세의 혁신리더 유성룡 / 이덕일 지음 / 역사의 아침
Date : 2017-12-22
Name : 생활의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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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이란 전대미문의 위기에서
조선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을까.

5. 한나라나 체제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병의 원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다.

정치.사회적으로는 신분제 문제이고,
경제적으로는 독점문제다.

나머지 문제들은 대부분 이 두가지 문제에서 파생된다.

27. 유성룡은 조선에서 양명학을 최초로 접했지만
그의 주변 환경은 양명학과 앙숙인 성리학 일색이엇다.

그가 태어 나기 두달전인 중종 37년 8월 풍기 군수
주세붕은 경상도 영주에 백운동서원을 세워 안향을 제향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백운동 서원은 명종5년 이황의 권의로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되면서,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림파가 조선의 지성계를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유성룡의 본관인 안동부 풍산현과 백운동서원이 위치한
영주는 가까운 곳이라 유성룡은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성리학을 접하며 자랐다.

30. 양명학과 주자학의 큰 차이는 사민(사.농.공.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주자학은 사대주의와 일반 백성의 신분 차이를
하늘이 정해준 천경지의로 생각하는 반면 양명학은 사민평등을 주장한다.

양명학은 사대부 계급의 우위5를 인정하지 않고
사민을 평등하게 바라보았다.

221. 황해도 관찰사 유영경은 명군의 횡포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중국 군사가 두려움이나 거리낌없이 행패를 부리며
작란하는 작태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말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도 쇄마를 요구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겁을 줍니다.

수령 이하 사람들은 목을 메어 끌고 다니기 까지 하는데
주포를 바치지 않으면 그들의 노여움을 풀 수가 없으며

군량도 외람되이 받아다가 매매비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뜻을 조금이라고 거역하면
몽둥이와 돌맹이로 무수히 난타당하는데,

요즈음 맞아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밖에 상처를 입고 신음하는 현상은 하도 비참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선조실록-26년9월6일

233. 성인의 마음은 천지만물을 일체를 삼으니
온 세상의 사람에 대해 내외원근의 구별을 두지 않고,

무릇 혈기 있는 것은 모두 형제나 친자식으로 여기고
그들을 안전하게 하고, 가르치고 부양하고

그 만물일체의 생각을 다하고자 하지 않음이 없다. 왕양면-전습록

233. 대인은 천지 만물을 한 몸으로 삼는자이다..
그는 천하를 일가 같이 여긴다.

대인이 천지 만물을 한 몸으로 삼는 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인이 원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가 됨은 어찌 대인만이 그러하겠는가.
비록 소인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그러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소인은 스스로 그 마음을 작게 할 뿐이다. -왕양명-대학문

239. 유성룡의 <훈련도감> 선조가 귀경하던 날 의 정경을 이렇게 전한다.
"계사년(선조26년) 10월, 거가가 환도하니 불타다 남은 너저분한 것들이 성안에 기득하고,
거기에다가 길가에 전염병과 기근으로 죽은 자가 서로 겹쳐 있으며,

동대문 밖에 쌓인 시체는 성의 높이와 가지런하니,
냄새가 지독하고 더러워 가까이 갈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 먹어서,
죽은 사람이 있으면 삽시간에 가르고 베어 피와 살덩어리가 낭자하였다.

254. 일반 백성은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었지만
양반 사대부는 면제되었다.

일반 양인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정병과 봉족으로 구성되는 병역의 의무를 졌지만
양반 사대부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노비들은 천인이라는 이유로 병역에서 면제되었다.
유성룡은 이부분에 손을 대지 않으면 근본적인 분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는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에 손을 대는 것이라
극심한 반발은 불 보듯 뻔했다.

267. 유성룡의 천인충군론은 당연히 사대부들의 격심한 반발을 샀다.

유성룡이 임란을 극복한 가장 큰 공신인데도
훗날 반대 당파의 집요한 공격으로 좇겨난 배경에는 바로 노비 충견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유성룡이 노비 충군론으로 사대부들의 계급적 이익에 정면도전했기 때문이다.

278. 임진왜란은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대부 지배체재의 무능함을 목도한 백성들은 왕조자체를 불신했다.

이제 백성들은 왕조에 직접저항했다.

선조27년에는 송유진이, 선조 29년에는 이몽학이 조선왕조 타도를 내걸고 봉기했다.

남부에 일본군이 잔류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조선왕조나 일본이나 다를것이 무엇이냐는 생각에서 개의치 않은 것이다.

송유진은 의병장을 사칭해 세력을 규합했는데,
지리산, 속리산, 청게산, 등에 은신하고 있던 일당의 수가 2천이 넘었다고 전한다.

송유진은 군량미와 무기까지 비축한 후
선조 27년 정월 보름에 서울을 점령하기로 거사 계획을 세웠다.

296. 백성이 살아나야 나라도 소생할 수 있다.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편한 정사를 해야 했다.

이때는 선조도 국망의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에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 들였다.

이렇게 임란 와중에 최초로 대동법이 시행되는데,
시행 당시에는 작미범이라고 불렀다.

대동법, 작미법, 대공수미법은 모두 같은 것으로 잡다한 공납을 폐하고
쌀을 통일해 내는 것을 말한다.

백성들은 이제 수 많은 가짓수의 공납 대신 쌀로 납부하면 되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토지 보유의다과가 부과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땅이 없는 가난한 백성들은 공납의 부담에서 해방된 것이다.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방납의 폐단도 없어졌으니 농민들의 부담은 대폭 경감되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단행한 과전법이래 최대의 개혁입법이었다.

304. 사헌부가 아뢰였다.
"기근이 극심해 심지어는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길가에 굶어죽은 시체에도 완전히 붙어있는 살점이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산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먹는다고 합니다.
옛날에 이른바 사람이 서로 잡아 먹는다고 한것도 이처럼 심하지 않았을 것이니,

보고 듣기에 너무도 참혹합니다.- 신조실록 27년1월17일

304. 조선은 "농업은 근본이고 상업은 끄트머리" 라는 농본상말 정책 때문에
상업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장사가 확대되면 농민들이 농업대신 상업으로 몰릴 것이고,
도적도 많이 질것이라는 이유로 상업을 억제했다.

341. 남인 유성룡과 정탁 등을 빼고는 이순신 제거에 온 당파가 단결했다.
길을 막고 호소하는 군사와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선조가 이순신을 증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은 백성의 조롱을 받는데 이순신은 백성의 추앙을 받는 것이다.

"임금께서 이 일이 모두 사실은 아닐 것이라 의심" 했다는
말은 유성룡의 의례적 수사에 불과하다.

선조는 이순신의 제거가 추락한 국왕의 권위회복에 필수라고 여기고 있었다.

406. 유성룡은 더 이상 세상에 나갈 마음이 없었다.

"도를 배울 뜻이 있으면서도 이루지 못한 것이 한이다." 라고 말했다.
그 스스로 인생의 목적을 도의 완성에 둔 것이다.

그해 5월6일, 유승룡은 숨을 거두엇다.
향년 66세, 조선조 500년 최고의 재상이라 평가받는 유성룡은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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